1. 서론: ‘모든 것을 먹는 자’의 시대
‘옴니보어(Omnivore)’는 원래 생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라틴어 omni(모두) + vorare(먹다) 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초식도 육식도 아닌 ‘잡식성 동물’을 의미합니다. 사람도 생물학적으로는 옴니보어이며, 인간의 유연한 식성은 진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죠.
하지만 오늘날 ‘옴니보어’는 생물학을 넘어, 문화, 취향, 소비, 지식 등 모든 것을 넘나들며 ‘잡식적으로 섭취하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음식뿐 아니라 콘텐츠, 예술, 음악, 언어, 패션, 사고방식까지 장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소비자, 즉 **‘문화적 옴니보어’**가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 개념의 확장: 문화적 옴니보어
2.1 사회학적 정의
사회학자 리처드 피터슨(Richard A. Peterson)은 1990년대에 **‘문화적 옴니보어’(Cultural Omnivore)**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더 이상 특정한 고급 문화(클래식, 발레, 미술관)만을 향유하는 것이 상류층의 상징이 아니며, 이제는 ‘다양한 장르를 포용하고 자유롭게 소비하는 능력’이 새로운 교양의 기준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 평소에는 BTS를 듣지만 클래식 공연도 즐기는 사람
-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주말엔 막걸리 바에서 전통주를 마시는 사람
- 전시회를 보면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몰아보는 사람
이러한 소비자가 바로 옴니보어형 소비자입니다.
2.2 특성
- 장르를 가리지 않음: 고급/대중, 동서양, 전통/현대 모두 수용 가능
- 경계를 넘나드는 취향: 특정 카테고리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
- 폭넓은 문화 자본: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열린 태도
- 비선형적 소비 패턴: 계획적이지 않고, 순간의 취향과 감정에 따라 움직임
3. 옴니보어 현상의 배경
3.1 디지털 플랫폼의 확산
유튜브, 넷플릭스, 틱톡, 스포티파이 등 콘텐츠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잡식성’을 부추깁니다.
- 한 계정에서 힙합, 클래식, 인디 음악이 모두 추천됩니다.
- 틱톡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기호를 학습하며 이질적 콘텐츠를 시도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환경은 자연스럽게 옴니보어적 취향을 형성하는 토양이 됩니다.
3.2 MZ세대의 취향 민주주의
MZ세대는 ‘취향에 위아래가 없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급진 것만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좋아하면 그게 곧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죠.
예:
- 편의점 김밥도 맛있고, 미쉐린 레스토랑도 즐긴다.
- 명품도 좋고, 마켓에서 산 수공예 귀걸이도 좋아한다.
이처럼 가치 기준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옴니보어적 태도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됩니다.
4. 다양한 영역에서의 옴니보어
4.1 음식에서의 옴니보어
- 한 끼는 채식 위주로 먹고, 저녁은 삼겹살
- 비건 쿠키를 먹으면서 고기 먹방을 시청
- 한국 음식, 태국 음식, 중동 음식, 파인 다이닝까지 다양하게 소화
이러한 식문화는 잡식성의 물리적 확장판이자,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수용력을 보여줍니다.
4.2 패션과 뷰티
- 스트리트 브랜드와 명품을 믹스 매치
- 빈티지와 하이엔드, DIY 액세서리 조합
- 남성도 글리터를 바르고, 여성도 스포츠 브랜드와 워크웨어를 소화
👉 성별, 세대, 트렌드에 얽매이지 않는 **‘다중적 스타일 소비자’**가 옴니보어입니다.
4.3 미디어와 콘텐츠
-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다가 BBC 다큐를 보고, 다시 유튜브 쇼츠를 보는 흐름
- 하루는 넷플릭스, 하루는 왓챠, 하루는 왓패드
- 드라마, 예능, 영화, 책, 웹툰, 다큐를 동시에 소비
4.4 지식과 학습
-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UX 디자인에도 관심을 가지고
- 경제 유튜브를 보다가, 명상 앱을 사용하는 사람
- 정치, 환경, 과학, 감성 콘텐츠를 넘나드는 정보 탐색
👉 이들은 한 가지 전문성보다 ‘다양성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5. 옴니보어형 소비자가 가져온 변화
5.1 브랜드 전략의 변화
- 콜라보 마케팅: 나이키 X 피스마이너스원, 구찌 X 아디다스 등 이질적 조합의 융합
- 취향 큐레이션: 무신사, 오늘의집, 트렌비 등 잡식적 소비 패턴을 반영한 추천 알고리즘
- 모듈형 소비: 선택과 조합이 자유로운 제품 구성 (ex. 카페 커스터마이징, 운동화 컬러 DIY)
5.2 미디어의 방향성
- 다양한 채널에 걸쳐 유연하게 브랜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함
- 하나의 플랫폼, 하나의 콘텐츠로는 옴니보어의 관심을 유지하기 어려움
- ‘이야기의 경계’를 허무는 크로스 플랫폼 전략 필요
6. 비판과 한계
옴니보어 소비는 다양성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내포합니다:
- 과잉 정보로 인한 피로감
- 정체성의 혼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 깊이 없는 소비: 넓게는 알지만, 얕게 소비하는 경향
- 일관성 부족: 브랜드나 서비스 입장에서 전략 수립이 어려움
👉 따라서 옴니보어를 위한 콘텐츠나 제품은 ‘가볍지만 깊이 있게’, 유연하지만 중심은 잡혀야 함이 중요합니다.
7. 결론: 옴니보어는 지금 우리 모두의 정체성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옴니보어’입니다. 우리는 같은 날 아침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점심엔 편의점 김밥을 먹고, 저녁엔 블록체인 투자 영상을 보면서 잠자리에 듭니다.
장르를 넘고, 시대를 넘고, 문화를 넘는 사람들.
이들은 ‘잡식성’이라는 단어 속에 자유, 개성, 수용, 확장성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전문가’와 ‘하나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것을 넘나들 줄 아는 유연한 소비자, 창작자, 기획자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